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화 투쟁 (문단 편집) === 결과 === >1871년에 프로이센 가톨릭 신자들은 23%만 중앙당을 지지했지만, 1874년에는 이 비율이 45%로 늘어났다. 비스마르크의 '문화투쟁'이 빚은 참화에 상당 부분 덕을 본 중앙당은 사회 환경에 깊이 뿌리박은 상태에서 이때까지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던 가톨릭 신자들을 동원하고 당과 정치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"일찌감치 세력을 떨쳤다."[* (책 속 주석)Jonathan Sperber, ''The Kaiser's Voters. Electors and Elections in Imperial Germany'' (Cambridge, 1997); Margaret Lavinia Anderson, ''Practicing Democracy. Elections and Political Culture in Imperial Germany''(Princeton, NJ, 2000), pp. 69-151.] 다른 정당은 비가톨릭 진영에 포진한 그들의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점점 중앙당을 따라 했지만, 1912년에 가서야 이들은 중앙당의 대도약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. 이때도 중앙당은 사민당 다음으로 제국의회에서 세력이 막강했다.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과 보수당 소속의 의원 대다수는 여전히 사민당과 손을 잡는 데 신중했기 때문에 중앙당은 가장 강력한 원내 세력이 되었다. 이런 결과는 비스마르크가 1871년에 문화투쟁을 전개했을 때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다. >---- >-크리스토퍼 클라크, [[http://www.kyobobook.co.kr/product/detailViewKor.laf?ejkGb=KOR&mallGb=KOR&barcode=9791190853026&orderClick=LEa&Kc=|《강철왕국 프로이센》]], 박병화 옮김 (서울: 도서출판 마티, 2020), 770쪽 비스마르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가톨릭 중앙당의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(...) [[분류:1870년대 사건사고]][[분류:독일 제국의 역사]][[분류:오토 폰 비스마르크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